(칼럼)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남덕종 목사]
본문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기독교를 핍박하는 나라들의 운명을 보십시오.
기독교를 핍박하는 나라들이 적어도 80개 나라가 넘습니다.
정치 세력들, 종교 세력들, 공산주의, 모슬렘, 각 종교 할 것 없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심지어 세속적인 사람들도 교회의 비리를 헤집으며 교회를 파멸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성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잠깐 동안 대적들에게 잠시 핍박을 받게 허용도 하시지만 결국은 악인들의 줄을 끊으십니다.
시129:4절.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6절.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지붕의 풀과 같이 말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선한 백성을 핍박하는 악인의 운명도 이렇습니다. 그들의 형통은 잠시이며 지위는 속히 높아지나, 파멸을 재촉합니다.
차라리 그들이 지위가 낮았다면, 아마 좀더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속히 익으면 속히 썩는다'는 옛 속담 그대로입니다.
시편의 경우에는 속히 음모를 꾸미고, 속히 타락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신론자, 회의론자, 이단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련하고 뿌리 없는 그것들은 잠시 존재했다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악은 그 안에 소멸의 씨를 갖고 있으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것입니다.
시129:7절.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가슴에 곡식을 안고 집으로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불의한 자는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됩니다.
그들의 번성함은 잠시 후 시들어 버립니다. 그들로 인하여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으며, 그들은 스스로도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근대 역사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20세기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두개골이 쪼개지고 전신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너무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3년 동안 독재하다가 사형을 당했던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비참하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탈리야의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하루 차이로 스위스 시골의 어느 농막에 숨어 지내다가 발각되어 기관총으로 비참한 말로를 장식합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처형 소식을 듣고 숨어있다가 두려움 가운데 권총 자살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킬링 필드의 대량학살 살인마 폴포트도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도 못자면서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암이 걸려 시골 헛간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살았던 루마니아의 차우세스크도 1989년 총탄 180발을 맞으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외에도우간다의 이디 아민, 아이티의 뒤발리에 필리핀의 마르코스 이집트의 무바라크, 등 독재자들의 최후는 모두 비참하게 끝나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주님이 독재자들을 심판 하십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북한 정권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정권과 백성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역사학자 베어드 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의 맷돌은 너무나 천천히 돌아 돌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부드럽게 갈아 냅니다.
기다림이 하나님의 본성이라면 조급증은 마귀의 본성 입니다 .
조금만 더 기다리면 주님이 오십니다. 역사 속에 오시고 민족속에 오십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오십니다.
길을 가다 보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목적지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남보다 앞서가는 것보다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보면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거짓된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힘겹게 살아가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의 마음도 흔들립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편 73편의 시인도 악인의 형통을 보며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눈앞의 성공만 보던 시선이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악인의 길에 즐거움이나 성공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길의 끝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데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가혹하지 않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내 욕심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인의 길은 언제나 흉악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는 작은 타협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거짓을 반복하면 양심이 무뎌지고, 미움을 품고 살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무감각해집니다.
그렇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자신을 변명하게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21:34
마음이 둔해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만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걸음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지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을 실천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의인의 삶에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으며,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그가 악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약속은 의인에게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길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성과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길에 남겨진 믿음과 눈물과 순종을 아십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수고도, 유혹 앞에서 지켜 낸 양심도 주님 앞에서는 헛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섭니다. 거짓으로 이익을 얻을 것인지, 손해를 감수하고 진실을 지킬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미움을 키울 것인지, 용서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이 됩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멀리 왔다고 해서 끝까지 그 길을 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오늘부터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걸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얼마나 잘되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사람들의 박수나 세상의 평가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분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주님을 따르다가 겪는 어려움 때문에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맙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읍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눈앞의 이익과 성공에 마음을 빼앗겨 바른길을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의 악을 판단하기 전에 저희 안의 거짓과 욕심을 먼저 살피게 하시고, 잘못된 길에서는 지체 없이 돌이키게 하옵소서.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고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주님께서 저희의 길을 아심을 믿게 하옵소서.
날마다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고, 마지막까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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